2021년 연말 코로나보다 지긋지긋한 ‘이념논쟁’이 고개를 들고 있다. 1987년을 배경으로 남파 간첩과 여대생의 러브라인을 그린 JTBC ‘설강화’로 촉발된 역사 왜곡 논란이 시끄럽다. 단 2회 방영에 청와대 청원홈페이지 게재된 민주화운동 왜곡에 대한 비판과 방영중지 청원은 30만명의 동의를 훌쩍 넘어섰다. 불매운동 위협으로 광고주 기업들은 제작 지원을 중단했다. 당연한 수순으로 작가, 역사학자, 비평가에 OST 참여 가수까지 덩달아 논쟁에 뛰어들었다.
우선 ‘설강화’에서 운동권이나 간첩 등 내용은 시대 분위기를 내는 소재로 사용될 뿐 역사 왜곡 의도를 발견하기 어렵다는 견해부터 조심스레 나온다. 운동권 폄훼론자들이나 국보법 운운 세력의 멘털리티는 다같이 열린 사회의 적이고 표현의 자유는 민주주의 사회 초석이라는 어느 비평가의 목소리도 설득력을 갖는다.
한편 작가의 펜이 늘 정의로워서 그 안에서 이야기를 만들어야 한다는 어느 작가의 강박 관념도 응원을 얻는다. 역사적 사실을 날조할 권리를 가진 창작자를 응징할 권리는 시민들에 있다는 어느 역사학자의 논리에도 고개가 끄덕여진다. 나아가 일본 위안부 미화 창작물까지 응징 범위를 넓히면서 창작자의 역사 날조 자유에 대한 사회·문화적 책임도 강조한다.
JTBC는 “‘권력자들에게 이용, 희생당했던 개인들의 서사 창작물”이라는 전제 하에 “향후 드라마 전개 과정에서 왜곡, 폄훼 오해가 해소될 것”이라는 입장이다. 그리곤 시청자 우려를 해소하기 위해 예정보다 앞당겨 성탄절 전후 3회 연속 특별 편성까지 했다. 제작진은 부당한 권력이 개인을 억압하는 비정상적 과거의 되풀이를 막자는 의도로 ’설강화‘를 제작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편성까지 비정상적으로 앞당겨야 하는 작금의 억압은 과연 정당한 상황인지 묻게 된다. 제작진이 민주화운동에 2차 가해할 자격이나 군사정권에 정당성을 부여할 능력이 되는지도 궁금하다. 오히려 그 누가 무슨 권리로 다른 의견을 가진 시청자의 감상 권리, 비평 자유를 침해하고 창작자의 자기 검열까지 함부로 강요할 수 있나 싶다.
물론 창작자의 책임은 엄격하다. 법적으로 명예훼손죄는 중대하며 사회, 문화적으로도 결코 자유롭지 않다. 하지만 역사관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드라마 소재로 역사가 등장하는 경우마저 진영 논리로 마구 재단하는 것은 오버 리액션에 불과하다. 2016년 김제동의 영창 개그에 무려 국감 증인을 신청했던 소동이 억지 개그였다면 드라마 소재에 대한 과민 반응은 나중에 또 다른 드라마 소재가 될 것이다.
올해 초 2회 만에 조기 종영한 SBS ‘조선구마사’의 오점을 기억하고 있다. 중국풍 소품과 일부 실존 인물 왜곡 논란이 우리 드라마에 많은 시사점을 던졌다. 5·18 왜곡 처벌법도 등장하고 드라마나 코미디 소재도 극히 제한되는 답답한 현실을 돌아본다면 최근 주민 웹툰작가의 시민 독재·자기 검열 운운은 괜한 볼멘 소리가 아니다. 성역은 자꾸 만들어 감출수록 더 더럽혀질 뿐이다.
우리는 ‘열린 사회’에 살고 싶다고 말한다. 하지만 막상 사도세자처럼 꽉 막힌 뒤주 속에 스스로 갇힌 것은 아닐까? 어느 법무부장관의 말처럼 그야말로 소설쓰는 횡포가 두렵다. 거창하게 칼 포퍼먼스까지 들먹일 필요도 없다. 창작과 조작은 구별하자. 성숙한 민주주의라면 예술가의 창작 대신에 선동가의 조작을 검열해야 마땅한 시대다.
이재경 건국대 교수/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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