ㄴ JTBC ‘설강화’는 방송 전부터 간첩·안기부 미화라는 비판에 직면해 ‘사전 검열’이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커졌다. JTBC 제공
■ What - ‘설강화’ 사태로 돌아본 시청자 주권 논란
‘간첩이 민주화운동 주도’ 역사왜곡 소문에 방송전부터 구설… 대중들이 폐지 청원하고 광고주 불매운동 ‘사전검열’ 방불
회차 거듭하며 일부 오해 풀렸지만 시청률 이미 타격… 근거없는 비방 편승 ‘아니면 말고식’ 언론도 문제 키워
1996년은 한국 콘텐츠 역사의 전환점이라 할 수 있다. 1993년 제기된 사전심의조항에 대한 위헌법률심판제청이, 3년 만인 1996년 10월 헌법재판소에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소위 말하는 ‘사전 검열’이 사라지며 콘텐츠 제작 과정에서 표현의 자유가 넓어졌다. 일제강점기, 영화 사전 검열을 위해 배치됐던 경찰 좌석인 ‘임검석’(臨檢席)의 존재 이유 또한 사라졌다. 하지만 25년이 지난 지금, 콘텐츠 시장은 새로운 검열과 맞닥뜨렸다. 소위 ‘시청자 주권’을 앞세운 대중의 목소리 앞에 크리에이터들은 숨을 죽이고 있다. 이로 인해 올해 초 역사 왜곡 논란에 휩싸인 SBS 사극 ‘조선구마사’는 2회 만에 폐지되는 초유의 사태를 겪었다. 그리고 현재는 JTBC 드라마 ‘설강화’를 둘러싼 논란이 한창이다.
국경을 넘어 세계인에게 공개되는 콘텐츠가 우리 역사를 왜곡할 우려가 있다면 응당 이를 바로잡아야 한다. ‘조선구마사’가 속히 막을 내린 이유다. 하지만 ‘설강화’의 경우, 공개 안 된 드라마를 두고 “방송하지 말라”는 주장이 나왔다. 전형적인 사전 검열이다. 방송이 시작된 직후, 이런 주장은 거세졌다. 제작진은 “믿고 지켜봐 달라”고 당부했고, 회를 거듭할수록 역사 왜곡 프레임은 점차 흔들리는 모양새다. 하지만 논란을 위한 논란은 남았다. ‘시청자 주권’이라는 미명 아래 여론을 결집·확산하는 각종 온라인 커뮤니티와 SNS, 이에 부화뇌동하고 반성없이 태도를 바꾸는 일부 언론이 빚어낸 살풍경이라 할 수 있다.
◇왜 이런 논란이 불거졌나?
‘조선구마사’의 역사 왜곡 논란이 불거진 지난 3월, ‘설강화’의 시놉시스 일부가 유출되며 도마 위에 올랐다. 1980년 민주화 운동이 벌어지던 시대적 배경 속에서 간첩이 등장하고,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 요원을 정의로운 인물로 묘사했다며 “역사 왜곡”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당시 ‘조선구마사’가 조기 종방을 결정하며 이 사태는 소강 상태에 접어들었지만, 지난 18일 ‘설강화’가 방송을 시작하며 논란이 재점화됐다. 게다가 세계적인 걸그룹 블랙핑크의 멤버 지수가 주연을 맡은 데다가 글로벌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플랫폼인 디즈니플러스에서도 공개돼 외국인에게 민주화 운동 관련 잘못된 역사관을 심어줄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왔다. 이에 연출을 맡은 조현탁 PD는 “문구 몇 개가 밖으로 유출되면서 받아들이기 힘든 말이 많이 퍼지게 되고, 기정사실처럼 받아들여졌다. 1차적으로 관리를 소홀히 한 제작진의 책임도 있기에 깊이 반성하고 있다”면서도 “방송을 여러분이 직접 보고 확인해주셨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하지만 방송 초반, 민주화 운동 장면이 삽입되고 이를 상징하는 민중가요인‘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가 흘러나오며 당초 제기했던 우려가 맞았다는 의견이 팽배해졌다. 이에 JTBC는 21일 배포한 공식입장문을 통해 “‘설강화’에는 민주화 운동을 주도하는 간첩이 존재하지 않고, 남녀 주인공이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거나 이끄는 설정은 대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라면서 “‘역사 왜곡’과 ‘민주화 운동 폄훼’ 우려는 향후 드라마 전개 과정에서 오해의 대부분이 해소될 것”이라고 해명했다.
◇조직화된 시청자들의 움직임
‘설강화’ 방송 시작 직후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방송 중단을 요청하는 글이 올라왔고 단숨에 30만 명이 넘는 동의를 이끌어 냈다. ‘설강화’의 제작을 지원한 광고주에 대한 불매 운동까지 일어나며 몇몇 광고주들이 사과와 함께 제작 지원 철회를 공식화하기도 했다. 온라인상에서는 ‘설강화’ 광고협찬 리스트까지 돌았다. 한 협찬사는 “‘설강화’가 민주화 역사를 왜곡하고 안기부를 미화할 수 있다는 많은 분의 우려가 있다는 것을 알게 돼 담당자에게 바로 협찬 철회를 요청했다”고 입장을 전했다.
시청자들은 “역사 왜곡”이라며 방송통신심의위원회에 민원도 넣었다. 방송 시작 후 채 한 달도 되지 않아 800건이 넘는 민원이 접수된 것으로 확인됐다. 이뿐만이 아니라 ‘설강화’의 편성 방송사인 JTBC 사옥이 있는 서울 상암동과 광화문 일대에는 ‘설강화’ 방송 중단을 요청하는 문구를 단 트럭 시위가 열렸다. 앞서 ‘조선구마사’ 사태를 경험하며 이 드라마의 폐지를 이끌어 낸 바 있는 시청자들이 보다 빠르고 단단하게 결속한 셈이다.
◇‘설강화’는 어떻게 방송을 이어갈 수 있었나?
ㄴ 역사 왜곡 논란으로 조기 종방된 SBS 사극 ‘조선구마사’.
‘설강화’의 방송 중단 요청은 ‘조선구마사’ 때와 비교되곤 한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두 사태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조선구마사’는 방송 시작 이후 명백한 역사 왜곡 및 폄훼로 볼 수 있는 장면이 삽입돼 구설에 올랐다. 이미 공개된 콘텐츠를 두고 객관적으로 판단하고 목소리를 낼 여력이 있었다는 의미다. 하지만 ‘설강화’는 ‘조선구마사’와 맞물려 시놉시스상의 몇몇 표현이 공격 대상이 됐다. 제작진이 “보고 판단해달라”고 주문했지만 성난 민심을 잠재우긴 어려웠다.
온에어 후에도 불길이 쉽사리 잡히지 않자 JTBC는 “시청자들의 우려를 덜어드리겠다”며 편성을 바꿔 3∼5회를 연이어 공개했다. 해당 회차에서는 남파 공작원인 주인공 수호(정해인 분)가 남한에 오게 된 배경과 남북한 수뇌부가 각각 권력과 돈을 목적으로 야합하는 내용이 포함됐다. 특히 수호가 자신을 구해준 영로(지수 분)를 인질로 삼으며 본색을 드러내는 등의 내용을 통해 간첩 및 안기부 미화, 간첩이 민주화 운동에 개입했다는 등의 오해를 상당 부분 해소했다.
JTBC의 한 관계자는 “내부에서는 매일 대본과 촬영본을 두고 분석하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그렇게 내린 결과 역시 ‘역사 왜곡은 없다’였기 때문에 방송을 강행한 것”이라며 “5회 이후 오해가 꽤 해소된 것으로 보고 있으나, 여전히 ‘설강화’를 보지 않고 여론에 편승해 비난하는 시각이 적잖다”고 토로했다.
‘설강화’가 이미 촬영을 마치고 디즈니플러스에 동시 방영 계약까지 맺은 작품이라는 점도 숱한 논란에서 견딜 수 있는 배경이었다. ‘조선구마사’는 논란이 불거질 당시 촬영이 진행 중이었고, 지상파에 편성돼 광고 판매가 불가하면 촬영이 진행될수록 손해가 눈덩이처럼 커지는 구조였다. 하지만 ‘설강화’는 이미 글로벌 OTT 판매 등 활로를 개척해놓은 상태라 소신을 지킬 수 있었다.
◇‘설강화’ 논란, 언론이 키웠다?
포털사이트 네이버 기준, 12월 들어 ‘설강화’의 역사 왜곡 논란을 다룬 기사는 줄잡아 1200여 건. 대다수는 그 현상과 역사 왜곡을 주장하는 이들의 일방적인 목소리를 담을 뿐, ‘설강화’의 내용을 면밀히 진단하려는 움직임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방송 시작 전 사전 검열을 우려하는 지적도 찾아보기 어렵다.
하지만 5회까지 방송된 후에는 또 다른 움직임이 포착됐다. 내용 반전을 통해 민주화 폄훼, 간첩·안기부 미화 등의 논란은 잦아들었으나, ‘시청률은 잃었다’는 식의 보도가 나오고 있다. 이미 돌아선 여론이 여전히 ‘설강화’를 곱게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역사 왜곡 프레임을 씌운 여론에 동조하며 그동안 맹공격을 퍼붓던 태도에 대한 반성은 없다. 언론 스스로가 사전 검열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알려주는 우(愚)를 범한 셈이다.
온라인을 기반으로 언론사 역시 무한 경쟁 시대에 접어들며, ‘깊이 있는 취재’보다는 ‘취재 없는 빠른 전달’에만 초점을 맞추는 모양새다. 대중의 더 많은 클릭을 유도하기 위해 여론에 휩쓸려 논조를 정하고, 무작정 편을 들기도 한다. 그리고 팩트 체크가 없었던 보도가 역풍을 맞으면 손바닥 뒤집 듯 태도를 바꾼다. 분명 ‘설강화’를 둘러싼 논란은 중심을 잡지 못한 언론이 키운 측면이 크다.
◇시청자 주권, 어떻게 바라봐야 하나?
‘조선구마사’와 ‘설강화’를 둘러싼 논란은 능동적으로 콘텐츠를 소비하는 시청자 주권을 일깨운 일대 ‘사건’이었다. 일방적으로 콘텐츠를 수용하고 소비하는 시대와, 댓글과 문자투표 등을 통해 1차원적으로 상호작용하는 쌍방향 시대를 거쳐, 시청자들의 목소리가 직접 콘텐츠의 방향성과 존폐에 영향을 끼치는 시대가 됐다. 하지만 시청자 주권이 남용되면, 콘텐츠의 진의와 관계없이 표현의 자유를 훼손하는 방향으로 흐를 수 있다는 위험성까지 함께 제기됐다.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가 SNS를 통해 “한쪽에서는 민주화운동을 폄훼했다고 난리를 치고, 다른 쪽에서는 간첩을 미화했다고 국가보안법으로 고발을 한다”면서 “드라마는 그냥 드라마로 봐라. 표현의 자유는 민주주의 사회의 초석이다. 그 초석을 흔드는 자들은 단호히 배격해야 한다. 도대체 무슨 권리로 다른 시청자들의 권리를 자기들이 침해해도 된다고 믿는 건지”라고 지적한 이유다.
한국언론학회가 발행하는 ‘커뮤니케이션 이론’ 2021년 겨울호에 ‘조선구마사 역사 표현의 쟁점과 함의’라는 논문을 싣기도 한 주창윤 서울여대 언론영상학부 교수는 ‘설강화’ 논란에 대해 한 언론을 통해 “‘설강화’의 역사 왜곡을 주장하는 논리대로라면, 영화 ‘써니’야말로 민주화운동을 훼손한 영화다. 민주화 시위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패싸움을 하고 흥겨운 댄스음악이 나오면서 시위대를 코믹하게 묘사했기 때문”이라며 “주장의 근거도 설득력도 없는 내용으로 방송 중지를 청원하는 것 자체가 도리어 민주주의의 가치를 훼손하는 일”이라고 꼬집었다.
올바른 시청자 주권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결국 언론을 비롯해 각계 전문가들의 역할이 필요하다. 자칫 여론에 휩쓸려 본질이 훼손되지 않도록 일정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익명을 요청한 한 언론학자는 “역사를 다루는 과정에서 고증은 필수지만, 논란을 만들기 위한 지나친 견제는 오히려 창작을 저해할 수 있다”면서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문제점을 정확히 파악하고 이를 바로잡으려 노력해야 하고, 언론은 단순히 네티즌의 의견을 전달하는 수준을 넘어 공정성, 중립성을 지킨 보도를 해야 한다”고 충고했다.
안진용 기자(realyong@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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